이세돌 9단 사인 티셔츠 바둑대회(?) baduk

▲ 바둑에 열중하는 사람들.


‘정연주 바둑대회’ 열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이왕 바둑으로 사람들과 친해질 것이면 제대로 한번 해보자’ 라는 생각에 특별한 준비를 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리 대비를 해두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닌가.

여러 가지 수읽기 끝에 ‘바둑으로 가장 친해진 사람에게 기념 선물을, 친해지기 전에 줄 수 있는 선물을’ 줘야겠다는 결론을 냈다. 결론을 내고 나서 신기하게 일이 술술 잘 풀렸다.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고마운 사람들이 좋은 마음으로 도움을 준 것이다. 많은 기념품들 중 나의 최고 보물은 바로 ‘이세돌 9단 사인 티셔츠’와 영문 바둑입문서 ‘레벨업’ 열 권이었다.

회사를 그만 두기로 결심하고 그간 감사했던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러 1주일을 비워 두었다. 당연히 프로기사들도 빠질 수 없는 감사의 대상들이었는데….

5년간 취재를 하면서 속 시원하게 뻥뻥 인터뷰를 잘 해준 이세돌 9단에게 감사의 인사도 전할 겸 개인적인 만남을 추진했다. 아마 이9단이 한국기원에 휴직계를 냈을 때쯤으로 기억된다. 머리가 복잡할 수도 있었을 시기였는데 큰 기다림 없이 오케이를 받아냈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나기 1주일 전쯤 지인과 함께 이9단을 압구정에서 만나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다.

“이사범님,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 1년간 미국으로 떠나는데요. 미국 바둑팬에게 선물할 사범님 사인 티셔츠가 필요합니다. 괜찮으시겠어요?”
“네~ 물론이죠. 근데 티셔츠에 한 번도 사인해 본 적 없는데요~ 어렵지 않나요?”

이것은 이9단을 만나기로 한 날 아침에 번개같이 스친 아이디어다. 일단 이9단을 만나기 전에 외국사람은 우리보다 덩치가 크니 엑스라지 티셔츠를 미리 구입해 두었다.

티셔츠에 사인은 처음 해 본다면서 미리 연습을 하긴 했지만 빳빳한 종이가 아닌 이상 자연스러운 필체가 나올 리 없다. 하지만 성격 시원하게 쓱쓱! 쾌히 하얀색 티셔츠에 ‘이. 세. 돌’ 이름 석자를 남겼다. 캬! 프로기사 취재만 해 왔지 이렇게 정식으로 사인을 받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싶어라.

두 번째 보물은 바둑이라는 평생 친구를 만들어 주신 노근수 바둑교실 선생님께서 전해주셨다. 인생의 멘토인 노근수 선생님에게 "미국에 가면 바둑클럽에 찾아가 영어도 배우고 바둑도 두고 싶다"고 하자 해외 바둑보급에 관심이 많으신 분을 소개시켜 주신단다. 다름 아닌 용인 동그라미 바둑교실 이재환 원장님. 이원장님은 바둑학과 이성근과 다니엘라와 함께 출간한 바둑영어책 ‘레벨업’ 시리즈 10권을 챙겨 주었고, 재미있는 캐릭터가 있는 배지 20개까지 챙겨 주셨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던 영문바둑 서적들을 5권 정도 챙겼다.

짧다면 짧은 5개월 동안 메사추세츠주 바둑협회와 MIT바둑클럽에서 활동을 하며 이 보물들을 어떻게 누구에게 전하는 것이 옳은지 가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작년 12월, 미국에 오기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 있었는데 이제 그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호랑이는 가죽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바로 메사추세츠주에 일명 ‘정연주 바둑대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두둥두둥!

나는 당시에 남미 일주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꼭 대회를 개최하고 나서 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로 떠나야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남미 일주를 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 일주를 할 참이었는데 어쩐지 나중이 되면 마음만 바빠지고 완벽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둑대회를 열고 싶은 나의 뜻을 MIT바둑클럽 모임에 온 메사추세츠주 공식 바둑 선생님 월터에게 전했다. 월터는 내 의견을 다시 한 번 확인을 하더니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바둑협회 회장과 이야기를 나눈뒤 다시 의견을 조율해 보자고 한다. 그리고 1주일간 월터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여러 방면의 이야기를 나누며 세부 사항에 대해 토론을 했다.

십여 통의 메일을 주고받은 결과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대회를 더 뜻 깊게 만드는 것이냐였다. 월터의 세심한 배려가 감사한 날들이었다.

▲ 월터와 나의 마지막 대국

대회 개요를 보면 1등은 이세돌 9단 사인 티셔츠, 2-3등은 소정의 상금을, 전체 참가자들에게는 바둑 캐릭터 뺏지 바둑 캐릭터 핸드폰 고리를 제공하기로 했다. 바둑입문 영어책 ‘레벨업’ 시리즈 10권은 메사추세츠주 바둑협회에 기증!

상품 조율이 끝나고 대회 방식에 대해서 논의를 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싶다는 의견을 내어 핸디캡 게임을 제안했고 월터도 대환영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룰은 메사추세츠주 공식룰인 중국식이며 총 3판의 스위스리그전이다. 시간은 각자 30분, 60초 초읽기 10회로 정했다.

물론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갑작스럽게 준비된 대회여서 홍보가 부족하다는 점. 1년에 네 번 공식 토너먼트가 있는데 정연주 바둑대회는 어중간한 시기에 열릴 예정이어서 참가자 수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면 더 좋겠지만 참가자 수가 1번으로 중요했던 것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어쨌든 대망의 날짜는 2009년 12월 6일 토요일!’
12월 6일 보스톤은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매서운 날씨였다. 10시에 바둑대회가 시작이니 9시 반까지는 와달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상품들을 가지고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바둑협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바둑협회에 들어서니 기분이 오묘하다. 이미 대회 준비에 한창인 월터와 잠깐 커피를 마시러 나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월터는 대회 시작 전 자리를 마련할 테니 내 소개를 하란다.

"어차피 다 알 텐데 뭘… 부끄러워서… NO"
참가 인원은 예상했던(?) 것처럼 많지 않았다. 공식적인 토너먼트를 할 경우 보통 35여명의 회원이 출전한다고 했는데 이날은 15명으로 반도 참석을 못했다. 미리 알고 있었고,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적은 인원을 보니 잠깐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지만 열정의 회원들 얼굴을 보며 금방 웃을 수 있었다.

회원들은 대회신청 접수를 하고 내가 준비해 간 바둑 캐릭터 배지와 바둑캐릭터 핸드폰 고리를 보며 환호를 했다. 서로 바둑캐릭터 배지를 웃옷에 달고는 누구 것이 더 멋있는지 자랑을 하기도 하고, 핸드폰 고리를 처음 보는 듯 신기해했다. 핸드폰 고리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것인데 내가 아는 외국인들 중에 핸드폰 고리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 어떤 친구는 “귀한 것을 후원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한다.

월터는 공식적으로 대회 룰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대회 시작을 알렸다.
드디어 역사적인 ‘정연주 바둑대회’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아하하 :)

▲ 우승자 에바(왼쪽)의 결승대국.

대회가 시작되고 진지한 모습으로 바둑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뿌듯한 마음에 영하 20도로 꽁꽁 얼었던 몸과 마음에 뭉클한 무언가가 잡히는 것이 느껴진다. 유일하게 대회에 출전하지 않은 나와 월터는 스위스리그 점수 계산을 하느냐고 바빴다. 1국이 끝나고 회원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점심시간을 정했다. 각자 점심을 먹고 다시 모인 시간은 2시. 2국도 어느새 끝이 나고 마지막 대국이 시작하고 더 이상 바쁠 일이 없는 월터는 나에게 ‘한 판?’ 이라는 눈짓을 보냈다.

월터와 내가 바둑 삼매경에 빠져있을 즈음 큰 카메라를 목에 건 중국계 사람이 등장했다. 바둑기자라는 중국계인 게구 씨는 나와 월터의 사진을 여러 장 찍고는 의자를 가져와 바둑을 감상했다.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바둑을 살펴보고는 약속이 있어 결과를 못 보는 것이 아쉽다며 ‘이 바둑 너무 재미있는데? 결과를 꼭 메일로 알려줬으면 좋겠어!’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나를 부른 뒤 잠깐의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한다. 10분 정도 간단한 인터뷰를 한 뒤 고맙다며 선물을 내민다. 뜻밖의 선물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어리둥절했다.
게구 씨가 돌아가고 월터와 나는 무슨 선물일까? 궁금해 하면서 개봉박두를 했다. 그런데! 헉! 금박 테두리 안에 있는 오바마 대통령 사진이었다. 월터가 선물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굉장히 고맙고 재미있는 선물인데, 좀 난해한데?”

▲ 에바는 두번째 대국을 이기며 2연승.

오바마 대통령 사진을 보며 빙글빙글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선물 이름은 ‘골드 오바마’였다. 아! 사진을 찍어 둘 것을…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면서 귀한 선물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아쉽다. 아쉬워. 이 선물은 내가 미국에서 받은 선물 중에 가장 희귀한 선물인데 말이다.

이렇게 작은 에피소드가 있은 뒤 대회는 끝이 났다.
“4전 전승을 한 4급의 에바! 축하합니다!”


정연주의 세계기행 연재
http://www.cyberoro.com/news/news_list.oro?div_no=13&c_div=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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